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이글은 1927년 3월6일, 전국 비종교인 협회 런던 남부지부 후원하에 배터시
(battersea)읍공화당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오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먼저, ‘기독교인’ 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뜻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요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말을 대단히 느슨한 의미로 하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라면 기독교인은 모든 종파나 교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말의 적절한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 - 불교인, 유교인, 회교인등 - 은 훌륭한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나는 누구든 저 나름대로
남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곧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분명한 신념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 말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
때만큼이나 그렇게 순수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때만 해도, 누군가 ‘나는
기독교인이오,’라고 하면 말뜻 그대로 이해되어졌다. 엄청나게 정교화된 교리
전체를 받아들이며, 교리에 나오는 자구 하나하나까지 확신을 다해 믿는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에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의미는 다소 막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될 별개의 조항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는 교리 차원의
것이다. 즉, 야훼와 영생을 꼭 믿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을 자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두 번째로, 좀더 들어가,
크리스천(기독교인)이란 명칭이 내포하듯 크라이스트(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회교도인들도 신과 영생을 믿고 있지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최소한 예수가 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정도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에 대해 그정도도 믿을 생각이 없다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물론 휘태커의 역서(歷書)나 지리책에서 보듯,
세계 인구를 기독교인과 회교도, 불교도, 배물교도 등으로 나누는 관점도 있긴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들이다. 지리책에서는 우리를 전부
기독교인에 집어넣고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관점이므로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를
받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왜 야훼와 영생을 믿지 않는가?
둘째, 왜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최선(最善), 최현(最賢)의 인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지난날 비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기독교에 대하 그처럼 탄력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옛날의 기독교는 훨씬 더 순수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영원한 지옥의
불에 대한 믿음은 극히 최근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조항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추밀원(Privy Council)의 결정으로 이 항목이 핵심적인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켄터베리 대주교나 요크 대주교는 그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우리의 종교는 의회의 법률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추밀원은
그들 대주교를 무시할 수 있었고 결국 지옥은 기독교인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은 반드시 지옥을 믿어야 한다고 우기진
않을 것이다.





야훼는 존재하는가?

야훼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아주 중차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내가 이 문제를 정말
제대로 다루려면 ‘천국’이 올 때까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붙잡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땐 내가 이 문제를 다소 약식으로 다루어도 여러분은 날 용서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여러분도 아는 바와 같이, 가톨릭 교회는 야훼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는 교리를 못박아두었다. 다소 기묘한 교리이긴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교리 중의 하나다. 그들이 이러한 교리를 도입하게 된 것은 한때
자유 사상가들이, 믿음의 영역에서는 물론 야훼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지만 이성만
가지고 따지자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러저러한 논거들이
존재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과 논거들이 장황하게
쏟아져 나오자 가톨릭 교회는 중단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야훼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못박았고, 자신들의 이론도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말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같은 이론은 물론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다뤄보기로 하겠다.




제 1 원인론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은 제일 원인론일 것이다(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의
원인은 야훼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오늘날 그다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원인이란 것 그 자체가 과거와 달리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원인에 대해 캐들어가고
있지만 옛날과 같은 활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제일
원인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이론에서 다소라도 타당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나의 경우, 젊을 때 이 문제에 대하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고, 오랫동안 제일
원인론을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나이 열여덟이었을 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야훼를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 구절이 내게 제일 원인론의 오류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야훼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야훼처럼 원인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 이론에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고 보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럼, 그 거북이는?’하고 물었더니
그 인도인은 ‘우리 주제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소.’ 라고 대답했다. 원인이
없다면 세상은 생겨나지 못했다고 볼 이유도 없지만 반대로, 세상이 항시 그렇게
존재해 있었다고 해서 안될 이유도 없다. ‘세상은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물에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볼 땐 제일 원인에 관한 이론으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자연법칙론

다음으로, 자연 법칙에서 끌어낸 아주 흔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특히 아이작
뉴턴 경과 그의 우주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18세기 내내 유행했다. 행성들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관찰한 사람들은 야훼가 행성들을
그렇게 특정한 형태로 움직이도록 명령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행성들이 그렇게
돌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편리하고 단순한 설명은 중력의 법칙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수고를 그들에게서 덜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중력의 법칙을 설명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이 해석한 중력의 법칙에 관해 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자면 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연은 획일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뉴턴식 체계하의
자연 법칙 따위는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의 인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까마득히 깊은
우주 공간에서도 1야드는 여전히 3피트라는 것을 여러분은 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가리켜 자연 법칙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연법칙으로 여겨져 왔던 것 중에는 이런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에 반해, 원자가 실제로 하는 일에 대해 알아보면 원자들이 법칙에 따르는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낮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도달하는 법칙들은 그저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것들의 통계적 평균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주사위를 던지면 36회에 한번씩 6이 연달아 나오게 된다는 법칙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 법칙이 주사위가 목적에 따라 구른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매번 6이 연달아 나온다면
거기엔 무슨 목적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법칙에는 이런 류의
것들이 매우 많다. 그것은 확률의 법칙에서 생겨나는 것과 같은 통계적
평균치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자연법칙의 모든 현상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감동이 줄게 되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변할지 모르는 과학의 일시적 상태를
대변하는 이러한 측면과는 별도로, 자연 법칙들의 존재는 결국 법칙 부여자를
함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 법치과 인간의 법칙을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인간의 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명령으로서, 여러분은 그대로 행동할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한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수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야훼는 왜 그러한
자연 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이것이 야훼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만일 상당수 정통 신학자들이 주장하듯, 야훼는 모든
법칙을 만듦에 있어 다른 법칙이 아닌 바로 그것들을 만들게 된 이유 - 물론
최선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하겠지만 실상을 보라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 가 있었다, 다시 말해 야훼가 만든 법칙들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면, 야훼 자신도 어떤 법칙에 따랐다는 얘기가 되므로 야훼를 중재자로
끌여들여봤자 아무런 유리할 것도 없게 된다. 결국 법칙은 신성한 칙령 외부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야훼는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적인 법칙 부여자가 아닌 셈이니까. 한마디로 자연 법칙에
관한 이러한 이론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 나는 이
이론들을 검토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야훼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이용되는 이론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처음에 등장했을 때
그것들은 명백한 오류들을 지식으로 위장한 견고한 이론들이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지적 지지도가 점점 낮아지자 일종의 도덕적 모호함으로 가장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목적론

다음으로 살펴볼 이론은 목적론이다. 여러분도 다 아는 얘기겠지만,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이것은 때로 다소 기묘한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 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목적론을
응용한 이 같은 해석을 토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의심스럽다. 패러디(parody)하기
딱 좋은 이론이다.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고 하는
볼테르의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류의 패러디는 18세기에는 엉뚱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보다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

이 목적론을 살펴보노라면, 온갖 결함들을 지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전지전능한 야훼가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생각해보라, 만일
여러분에게 전지전능과 수백만 년의 세월을 주면서 세상을 완성시켜보라고 했다면
고작 공포의 KKK단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만들 수 없었을까? 게다가, 과학의
일반 법칙을 인정한다면 인간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다 멸종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계 몰락의 한
단계로서 말이다. 몰락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원형질의 생성에 적당한 온도 따위
조건들이 주어기고 그렇게 해서 태양계 전체의 일생 가운데 잠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달에서 지구의 예상되는 앞날을 본다. - 죽음, 냉기,
무생명으로 뒤덮인 그 모습 말이다.

그런류의 시각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고, 그런 견해를 믿는다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믿지 말기
바란다. 말도 안돼는 소리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후에 일어날 일을 두고
정말로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자기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실상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훨씬 더 현세적인 일, 이를테면 단순한 소화 불량 때문일 수는
있지만 수백만 년 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정말로 심각하게
슬퍼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생명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우울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 그러나
이따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곰곰이 성찰해보노라면 나로선
그 생각이 차라리 위로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 그것 때문에 인생이
비참해질 것까진 없다고 본다. 그저 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보게 만드는
정도일 것이다.




신성을 위한 도덕론

이제 우리는, 신학자들이 논증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지적 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에서 좀더 깊이 들어간 단계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소위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도덕론과 만나게 됐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과거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지적 이론에는 세 종류가 있었는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에 와서 모두 처분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그러한 이론들을 처분하자마자 새
이론을 하나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론이며 그는 이 이론을 굳게 확신했다.
사실 칸트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했다. 즉, 지적 차원에서는 회의적이었고
도덕적 차원에서는 자기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들어온 금언들을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정신 분석가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사실 하나가 입증된다.
사람에게는 성장 후의 관계보다 유년기의 관계에서 받은 영향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는 얘기 말이다.

어쨌거나 칸트는 앞서 말한대로,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새로운 도덕론을
창안했으며 그 이론은 다양하게 형태를 바꿔가며 19세기 내내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도덕론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는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옳고 그름 사이에 실제로 차이가
있든 없든 나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의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야훼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야훼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면 야훼
자신에게는 옳고 그림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야훼에게는
선(善)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 뜻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만일 여러분들이
신학자들처럼 야훼는 선하다고 말하려면 옳고 그름은 야훼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야훼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야훼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선, 옳고 그름은 오직 야훼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논리적으로 야훼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각장의 기호에 따라, 보다 우월한 신이 있어 이
세계를 만든 야훼에게 명령을 내린 거라도 해도 좋고, 우리가 알 고 있는 이
세계는 사실 신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악마가 만들어낸 것이라도 보는 일부
그노시스(gnosis)주의자들의 노선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대단히
그럴싸한 견해라고 종종 생각해보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할 말들이 많을 것이고
나도 지금 그 문제로 시비하고 싶진 않다.




불의 치유론

이번에는 도덕론의 아주 기이한 형태를 하나 다뤄보자. 그것은 야훼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不義)가 존재한다. 그리고 선한 자들이 고통 받는
일도 많고 악한 자들이 융성하는 일도 많아서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운
일인지조차 분간이 안 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선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게 하기 위해 야훼는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세상밖에 모른다.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오렌지 상자를 하나 받아서
열어보았다고 가정해보자. 맨 윗줄 오렌지들이 모조리 상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그 밑의 것들은 분명히 싱싱할 것이다. 그래야 불균형이 바로
잡히니까.’ 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상자 전체를 상한 것들로만 채워
보냈겠군.’ 이라고 말할 건인데, 과학적인 사람이 우주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는 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도덕론이 아닌 부인하는
도덕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설명해온 지적
이론들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건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야훼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야훼를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야훼를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

이제부터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종종 생각되는
문제에 대해 몇마디 말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최선, 최현의
사람이었나 하는 문제 말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누구나 동의할 거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예수에게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점들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하며, 그 공감의 정도는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나는 그와 더불어 여느 독실한
기독교인보다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예수가 한 말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주어라.’ 이것은
새로운 가르침도 새로운 신조도 아니다. 예수보다 약 5,6백년전에 이미 노자가
석가가 하신 말씀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진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현 수상(스탠리 볼드윈)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가
독실하기 그지없는 기독교인이라는 데 대해선 나도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가서 그 사람의 뺨을 때려보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아마도 여러분은 수상이 성경의 구절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테지만.

그런데 내가 볼 때 아주 훌륭한 게 하나 더 있다.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잘 알지 못 할
테지만 한때 기독교 국가들의 법정에서 이 신조가 유행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 판사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기독교 신조에 위배된다고 느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또한 예수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줄 것이며, 네게서 빌어가고자 하는 자를 외면하지 말라.’
고 했는데 이 말 역시도 훌륭한 신조다.

좀전에 여러분들의 협회장은 우리가 여기서 정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있지만 나로선 지난번 총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네게서
빌어가려 하는 자를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의 문제를 두고 붙은
싸움이었으며, 그러니 우리로선 이 나라의 자유당과 보수당이 예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그들은 정말이지
매몰차게 외면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데, 내가 볼 땐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우리의 기독교인 친구들 사이에선 크게 인기있는 것 같지가 않다.
바로, ‘네가 완벽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대단히 뛰어난 가르침이지만 말한 바와 같이,
그다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좋은 가르침이라도 생각한다.
그러나 살면서 행하기는 다소 어렵다. 당장 나부터도 그 말씀들에 따라 산다고
공언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다 그렇다고해도 기독교인은 경우가 한참 다르다.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결함들

나는 예수가 남긴 교훈들이 훌륭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복음서들에 묘사된 것과
같은 예소의 최고 지혜나 최고 선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몇가지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적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예수가 과연 존재했는가부터
지극히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로선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대단히 어려워진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이기 때문에 복음
기록자의 해석에 따르겠지만, 그 중에는 그다지 현명한 것 같지 않은 대목
몇군데가 발견된다. 첫째, 예수는 자신이,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찬란한 구름 속에서 재림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이것을 증명할 만한
구절은 대단히 많다. 예를 들어 ‘사람의 아들(구세주)이 올 때까지 너희는
이스라엘로 넘어가지 못 하리라.’고 예수는 말했다. 도 ‘여기 서 있는 자 중에
사람의 아들이 그의 왕국으로 들어갈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자가 몇 명
있다.’고도 하였다. 예수가 그렇게 믿었다고 보여지는 대목은 그밖에도 많다.
예수는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생전에 자신의 재림이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의 초창기 추종자들도 그렇게 믿었고 수의 수만은 도덕적 가르침의 기초도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기타 그와
유사한 말들을 했을 때는 가까운 시일 내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니 현세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기독교일들을 실제 몇 사람 알고 있다. 재림이 정말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말해 교인들을 놀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목사도 한사람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 목사가 정원에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안심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들이 정원에 나무
심는 것과 같은 행위들을 삼간 것은 재림이 임박했다는 믿음을 예수에게서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분명히 다른 지혜로운 이들만큼
현명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지고의 현자일 수도 없었다.




도덕상의 문제

이제 도덕적 문제로 넘어가보자. 내가 볼 때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는 대단히
중대한 결함이 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즉, 그가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그려진 대로라면 예수는 분명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복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대목이 수차례 발견된다. 이러한 태도는 평범한 설교자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것도 아니지만 훌륭한 존재가 그런다는 것은 어쩐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 테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
말에 귀 기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점잖았음 보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격분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성자다운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라든지, 자기와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 늘 했던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보게 된다. ‘너희, 뱀의 무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하겠느냐?’ 예수가 자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내가 볼 땐 결코 좋은 어조가 아니다.
복음서에는 지옥을 언급하는 이런 말이 대단히 많다. ‘누구든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많은 불행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니 모두
성령에 대해 죄를 지은 것 같아 모두들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를 모두 거두어 불가마에 던져버리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게 되리라.’

통곡하고 이를 간다는 대목을 예수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통곡하고 이를 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떤
쾌감을 느낀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그처럼 자주
언급될 리가 없다. 다음으로 여러분은 양과 염소에 관한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재림이 일어날 때 양과 염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얘기하면서 예수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이들을 영원한 불 속에 사라지게 하라.’고 한다. 이어 다시 이렇게 말한다.
‘너의 한손이 내 뜻을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병신이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
나으리라. 거기에는 언제나 구더기가 들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 이 얘기
역시 예수는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나는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불로 다스린다는
이 모든 교리가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 잔인성을
심고, 대를 잇는 잔인한 고문을 부여한 교리다.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볼 때,
예수 기록자들이 묘사한 대로라면 분명 복음서의 예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중요성은 다소 덜하지만 그밖에 다른 예들도 있다. 이를테면 가다렌(Gadarene)
지방의 돼지떼 관한 대목에서는 참으로 비정하게도 마귀를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하여 온 돼지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 속에 빠져버렸다.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가 전능자였다는 것, 따라서 마귀들을 그냥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는 마귀들을 돼지들 속에
들여보냈다. 이번에는, 들을 때마다 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희한한 얘기가 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얘기지만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시장기를 느낀 예수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고 가셨다. 무화과수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고
나무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 하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수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닌데 나무를
탓하다니 말이다. 나로서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남은
다른 사람들만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런 점들에 있어서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적 요소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유는 이론과는
아무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서적 이유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는 사람을 덕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나도 그런 얘길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가하진 않는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패러디한 사뮤엘 버틀러(Samuel Butler)의
‘다시 찾은 에레혼’이란 책을 물론 알 것이다. 히그스라는 사람이 에레혼이라는
어느 먼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 얼마간 지내던 그는 기구를 타고 빠져
나온다. 이십 년이 지난 후 그 나라를 다시 찾은 그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로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가 퍼져 있음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가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때마침 그의 승천 기념제가 벌어지려고 하는 순간 그는
행키와 팽키라는 교수들이 서로 얘기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들은 인간
히그스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름아닌 태양의 아들교의 고위 사제들이다. 격분한 히그스는 그들에게
가 말한다. ‘나는 이 엉터리 수작을 모두 폭로하고 그들의 신은 바로 나,
인간 히그스이며 나는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거라고 에레혼 사람들에게
밝히겠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 나라의 모든
도덕은 이 신화를 중심으로 짜여 있어요. 만일 당신이 하늘로 올라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사악해질 겁니다.‘ 결국 그는 그들의 얘기에
설득당한 채 조용하게 빠져나온다.

바로 이 점이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사악해질 것이랑 얘기
말이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극악했다. 여러분은 이
기묘한 사실, 즉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고 악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나 기독교를
철저히 믿었던 소위 신앙의 시대에는 고문 기구를 갖춘 종교 재판소가
존재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잔인한 폭력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여러분도 세상을 둘러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서적 발전, 형법의 개선,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 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구는 한 번도 없었다. 교회들로
조직화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으며 지금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나는 긴 심사숙고 끝에 말하는 바다.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진보를 저해해 왔는가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가지 사실을 들어보자.
이 얘길 들으면 여러분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만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유쾌하지 못한 사실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한 순결한 처녀가 매독 환자에게 시집을 갔다고
가정해보다. 이런 경우 가톨릭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이는 파기할 수 없는
신성한 맹세이니 너희는 평생을 같이 살아야한다.’ 게다가 이 여인은 매독에
중독되어 태어날 아이를 낙태하고 싶어도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게끔 되어있다.
이런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가 하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악마적 잔인성에
다름아니라고 단언하는데, 타고난 동정심이 독단으로 깡그리 포장된 사람이
아니라면, 도덕적 본성이 모든 고통의 감각 앞에 완전히 마비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한 혼인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위의 얘기는 일례에 불과하다. 현재 이 순간에도 교회는 자칭 도덕이라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과다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편협한 행동 규범을 정해 놓고, 그것을 도덕이라고 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요 역할은 여전히,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에
맞서는 데 머문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저러한 것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므로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그 문제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이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덕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 말이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종교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한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이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이제야 사물을 좀 이해했고 어느 정도
정복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과학이 기독교와 교회에 맞서, 또한 모든 낡은
교훈에 맞서 한 걺 한걸음씩 어렵사리 전진해 온 덕분이다. 인류는 세세손손 그
오랜 세월 비굴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으나 과학은 우리가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과학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자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 온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우리의 할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로 서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끔찍한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경멸감마저 든다.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바라던 만큼 되지 않을 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온 세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지식과 온정과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혹은 오래전에 무식한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로 자유로는 지성에 족쇄를 채우는 짓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2010/08/30 21:24 2010/08/30 21:24
Posted by Jay.


The Emotional Factor
감정적 요소

As I said before, I do not think that the real reason
that people accept religion has anything to do with argumentation.
They accept religion on emotional grounds.
One is often told that it is a very wrong thing to do to attack religion,
because religion makes men virtuous.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사람들이 종교를 긍정하려는 진정한 이유가
토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종교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종교가 사람에게 덕성을 갖추어 주기 때문에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So I am told; I have not noticed it.
You know, of course, the parody of that argument
in Samuel Butler's book, Erewhon Revisited.
You will remember that in Erewhon there is a certain Higgs
who arrives in a remote country, and after spending
some time there he escapes from that country in a balloon.

저도 그런 말을 들었으나 그런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본적은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토론을 흉내낸 것이
사뮤엘 버틀러의 저서 에리훤 속에 있습니다.
에리훤 속에 나오는, 먼 나라에 도착하여 얼마 동안 거기서 지낸 뒤
풍선을 타고 탈출한 힉스라는 사나이를 기억하시겠지요.
주)
사뮤엘 버틀러(1835-1902) : 영국의 시인.
풍자소설 에리훤을 출간하여 영국인의 위선과 타협적 태도를 통렬히 공격했고,
저서전 <만인의 길>을 통해 당시의 종교적 도덕성을 비난하였다.

Twenty years later he comes back to that country
and finds a new religion in which he is worshipped
under the name of the "Sun Child,"
and it is said that he ascended into Heaven.
He finds that the feast of the Ascension is about to be celebrated,
and he hears Professors Hanky and Panky say to each other
that they never set eyes on the man Higgs, and they hope they never will;
but they are the High Priests of the religion of the Sun Child.
He is very indignant, and he comes up to them, and he says,
"I am going to expose all this humbug and tell the people of Erewhon
that it was only I, the man Higgs, and I went up in a balloon."
He was told, "You must not do that,
because of all the morals of this country are bound round this myth,
and if they once know that you did not ascend into Heaven
they will all become wicked"; and so he is persuaded of that
and he goes quietly away.

20년 후 그는 이 나라에 돌아와 새 종교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종교에서 그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숭상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때마침 자기를 위한 승천의 향연이 벌어지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행키와 팽키라는 두 교수가 자기들끼리
자기를 힉스란 사람의 얼굴도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태양의 아들, 종교의 고승들입니다.
힉스는 몹시 분개하여 그들에게 다가서며
나는 이 엉터리 수작을 송두리째 폭로하고
에리훤 나라 사람들에게 '바로 내가 힉스라는 사람이며,
나는 풍선기구를 타고 올라간 것이라고 말하겠다' 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모든 도덕은 이 신화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일단 그들이 당신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악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득되어 소리 없이 그곳을 빠져나가 버립니다.

That is the idea
-- that we should all be wicked if we did not hold to the Christian religion.
It seems to me that the people
who have held to it have been for the most part extremely wicked.
You find this curious fact, that the more intense
has been the religion of any period
and the more profound has been the dogmatic belief,
the greater has been the cruelty and the worse has been the state of affairs.
In the so-called Ages of Faith,
when men really did believe the Christian religion in all its completeness,
there was the Inquisition, with all its tortures;
there were millions of unfortunate women burned as witches;
and there was every kind of cruelty practiced upon all sorts of people
in the name of religion.
바로 이런 생각입니다.
즉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독교를 지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매우 악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상한 사실, 즉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독단적인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더 나빠졌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라 불려지는 중세에는
사람들이 정말 철저하게 기독교를 믿었는데도 종교재판의 고문은 극에 달했습니다.
몇 백만 명의 운이 나쁜 수 없는 여성이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고,
종교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갖가지 잔인성이 가해졌습니다.

You find as you look around the world
that every single bit of progress of humane feeling,
every improvement in the criminal law, every step toward the diminution of war,
every step toward better treatment of the colored races,
or ever mitigation of slavery, every moral progress
that there has been in the world,
has been consistently opposed by the organized churches of the world.

여러분이 세상을 돌이켜 둘러본다면,
여러분은 인간의 의식을 진보하게 하는 아주 작은 모든 일에도,
범죄에 대한 형법상의 모든 개선책도, 전쟁을 줄이는 쪽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안도,
유색 인종의 대우 개선을 위하려는 모든 대책도,
또는 노예제도의 완화나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진보도
모두 세계의 조직화된 교회에 의하여 철저히 반대되어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I say quite deliberately that the Christian religion,
as organized in its churches, has been and still
is the principal enemy of moral progress in the world.
저는 그 자신의 많은 교회로 이루어진
기독교 신앙이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으뜸가는 적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아주 신중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How The Churches Have Retarded Progress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진보를 지연시켰는가?
You may think that I am going too far when I say that
that is still so, I do not think that I am.
Take one fact. You will bear with me if I mention it.
It is not a pleasant fact,
but the churches compel one to mention facts that are not pleasant.
Supposing that in this world that we live in today
an inexperienced girl is married to a syphilitic man;
in that case the Catholic Church says,
"This is an indissoluble sacrament.
You must endure celibacy or stay together.
And if you stay together, you must not use birth control
to prevent the birth of syphilitic children."
Nobody whose natural sympathies have not been warped by dogma,
or whose moral nature was not absolutely dead
to all sense of suffering could maintain that it is right
and proper that this state of things should continue.

지금도 역시 그렇다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제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한가지 실례를 들어봅시다.
제가 어떤 이야기를 언급하더라도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교회는 불쾌하시겠지만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한 경험 없는 여성이 매독 환자인 남자와 결혼했다고 가정합시다.
이 경우에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서약이므로 일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 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여성은 매독성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한 어떠한 방도도 취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카톨릭 교회가 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악마의 잔인성이라고 단언하며,
누구나 그 자연대로의 동정심이 아직 독단으로 물들지 않고
그 덕성이 고통의 함정 앞에 완전히 마비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태로 계속하는 것이 옳으며 타당한 일이라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That is only an example.
There are a great many ways in which, at the present moment,
the church, by its insistence upon what it chooses to call morality,
inflicts upon all sorts of people undeserved and unnecessary suffering.
And of course, as we know,
it is in its major part an opponent still of progress and improvement
in all the ways that diminish suffering in the world,
because it has chosen to label
as morality a certain narrow set of rules of conduct
which have nothing to do with human happiness;
and when you say that this or that ought to be done
because it would make for human happiness,
they think that has nothing to do with the matter at all.
"What has human happiness to do with morals?
The object of morals is not to make people happy."
이것은 단지 한 일례에 불과합니다.
현재 이 순간에도 교회가 자칭 도덕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을 강요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죄 없는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교회가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떤 일련의 편협한 행동규범들에 도덕이라는 딱지를 붙여 놓음으로써,
아직도 교회의 주요 역할은 이 세상의 고통을 덜어 주는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을 가로막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저런 일들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행해야만 한다고 말하면,
교회는 행복과 그런 문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과 인간의 행복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도덕의 목적은 사람들의 현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답니다."
 
 
Fear, The Foundation Of Religion
종교의 기반은 공포
 
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It is partly the terror of the unknown and partly, as I have said,
the wish to feel that you have a kind of elder brother
who will stand by you in all your troubles and disputes.

종교는 원래, 주로 공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이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려운 일이나 남과 다투는 일이 있을 때 힘이 되어 줄
일종의 형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은 심정입니다.

Fear is the basis of the whole thing
-- fear of the mysterious, fear of defeat, fear of death.
Fear is the parent of cruelty, and therefore
it is no wonder if cruelty and religion have gone hand in hand.
It is because fear is at the basis of those two things.
그것이 신비적인 공포이든, 패배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이든,
죽음에 대한 공포이든 간에, 공포가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포는 잔인성의 어버이입니다.
따라서 잔인성과 종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간다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포가 이 두 가지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In this world we can now begin a little to understand things,
and a little to master them by the help of science,
which has forced its way step by step against the Christian religion,
against the churches, and against the opposition of all the old precepts.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사물을 좀 이해하기 시작해도 좋을 것이며,
과학의 도움으로 이를 다소 정복하기 시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항하고, 교회에 대항하고, 모든 낡은 개념의 방해에 대항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온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말입니다.

Science can help us to get over this craven fear
in which mankind has lived for so many generations.
Science can teach us, and I think our own hearts can teach us,
no longer to look around for imaginary supports,
no longer to invent allies in the sky,
but rather to look to our own efforts here below
to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to live in,
instead of the sort of place the churches
in all these centuries have made it.

과학은 인류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두고 숨어 살아오던
비굴한 공포에서 우리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 우리는 더 이상 하늘에서 발견한 후원자를 찾지 않고,
더 이상 상상의 도움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과학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마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교회가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그런 장소가 아니라
여기 이 아래에 있는 세상에 우리 자신들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장소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What We Must Do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e want to stand upon our own feet
and look fair and square at the world
-- its good facts, its bad facts, its beauties, and its ugliness;
see the world as it is and be not afraid of it.
Conquer the world by intelligence
and not merely by being slavishly subdued by the terror that comes from it.

우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딛고 서서 이 세상을 똑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좋은 면이나 나쁜 면이나, 그 아름다움이나 흉함을 보아야 하며,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지성으로써 이 세상을 정복할 것이며,
단순히 거기서 일어나는 공포에 의해 비굴하게 압도되어서는 안됩니다.

The whole conception of a god
is a conception derived from the ancient oriental despotisms.
It is a conception quite unworthy of free men.
When you hear people in church debasing themselves
and saying that they are miserable sinners, and all the rest of it,
it seems contemptible and not worthy of self-respecting human beings.

신이라는 개념은 모두 고대 동양의 전체주의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그것은 자유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기 지신을 비하하며
가엾은 죄인이니 뭐니 하는 그따위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은 경멸해야 할 것으로 자존심이 있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We ought to stand up and look the world frankly in the face.
We ought to make the best we can of the world,
and if it is not so good as we wish, after all it will still be better than
what these others have made of it in all these ages.
우리는 똑바로 서서 이 세상을 솔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만일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그렇게 좋지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이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여태껏 만들어 놓은 세상보다는 훨씬 더 좋아지게 할 것입니다.

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it does not need a regretful hankering after the past
or a fettering of the free intelligence
by the words uttered long ago by ignorant men.
It needs a fearless outlook and a free intelligence.
It needs hope for the future,
not looking back all the time toward a past that is dead,
which we trust will be far surpassed by the future
that our intelligence can create.

좋은 세상은 지혜와 친절과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무지한 사람들이 지껄인 말로 인해
과거를 추종하는 열망에 미련을 둘 필요도 없고
자유로운 지성에 족쇄를 채울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은 두려움 없는 견해와 자유로운 지성을 필요로 합니다.
좋은 세상은 언제나 이미 죽어버린 과거를 향해 돌아보지 않는
미래에의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지성으로 창조해 나가는 세상이
지난 과거보다 훨씬 더 나은 미래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2008/08/06 03:57 2008/08/06 03:57
Posted by Jay.

Why I Am Not A Christian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
by Bertrand Russell
버트란드 러셀
March 6, 1927
National Secular Society, South London branch
Battersea Town Hall
 
 

As your chairman has told you,
the subject about which I am to speak tonight is
"Why I Am Not a Christian."
사회자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밤에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연설의 제목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Perhaps it would be as well, first of all,
to try to make out what one means by the word "Christian."
It is used these days in a very loose sense by a great many people.
먼저 ‘기독교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은 줄 압니다.
이 말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너무 소홀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Some people mean no more by it than a person
who attempts to live a good life.
In that sense I suppose there would be Christians of all sects and creeds;
but I do not think that is the proper sense of the word,
if only because it would imply that all the people who are not Christians
-- all the Buddhists, Confucians, Mohammedans, and so on --
are not trying to live a good life.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란
선량한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모든 종파와 교의에는 기독교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말에 타당한 의미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도가 아닌 모든 사람들,
즉 모든 불교나 유교나 회교를 믿는 사람들은
선량한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는
이유하나 만으로도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I do not mean by a Christian any person
who tries to live decently according to his lights.
I think you must have a certain amount of definite belief
before you have a right to call yourself a Christian.
저는 기독교인들 자기의 주의에 따라
선량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부를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여러분 자신이
어느 정도의 명확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he word does not have quite such a full-blooded meaning now
as it had in the times of St. Augustine and St. Thomas Aquinas.
In those days, if a man said that he was a Christian,
it was known what he meant.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 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만큼
생기발랄한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군가가 ‘저 사람은 기독교도다’라고 말하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You accepted a whole collection of creeds
which were set out with great precision,
and every single syllable of those creeds you believed
with the whole strength of your convictions.
그 사람들은 매우 엄격하게 표현된 교의의 집성을 긍정했으며,
그 교의의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확신을 가지고 믿었던 것입니다.
 
 
 
What Is A Christian?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
 
Nowadays it is not quite that.
We have to be a little more vague in our meaning of Christianity.
I think, however, that there are two different items
which are essential to anyone calling himself a Christian.
The first is one of a dogmatic nature
-- namely, that you must believe in God and immortality.
If you do not believe in those two things,
I do not think you can properly call yourself a Christian.
Then, further than that, as the name implies,
you must have some kind of belief about Christ.
오늘날은 도저히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기독교는 좀더 그 뜻이 막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려면
다음의 서로 다른 두 조항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의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서,
하나님과 불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지 않는다면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름 그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The Mohammedans, for instance, also believe in God and immortality,
and yet they would not call themselves Christians.
I think that you must have at the very lowest the belief
that Christ was, if not divine, at least the best and very wisest of men.
If you are not going to believe that much about Christ,
I do not think you have any right to call yourself a Christian.
예를 들면 회교도들도 신과 불멸을 믿고 있지만,
회교도들은 자기를 기독교인이라고는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무리 격하시키더라도 그리스도가 하느님은 아닐지 모르나,
적어도 '인간 중에서는 가장 선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고 하는
신앙은 가지고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이만큼이라도 믿음도 없다면
나는 당신이 자신 스스로를 기독교도라고 부를 어떤 권리도 없다고 봅니다.
 
Of course, there is another sense,
which you find in "Whitaker's Almanack" and in geography books,
where the population of the world is said to be divided into Christians,
Mohammedans, Buddhists, fetish worshippers, and so on;
but in that sense we are all Christians.
The geography counts us all in,
but that is a purely geographical sense, which I suppose we can ignore.
물론 위테커 씨의 연감과 지리책에 있는 것과 같이
다른 관념도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도, 회교도, 불교도, 물신숭배자 등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런 지리적 관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기독교도입니다.
지리책은 우리를 전부 기독교도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의미에서이며, 이것은 무시해도 좋다고 봅니다.
 
Therefore I take it that when I tell you why I am not a Christian
I have to tell you two different things:
first, why I do not believe in God and in immortality;
and, secondly, why I do not think
that Christ was the very best and wisest of men,
although I grant him a very high degree of moral goodness.
But for the successful efforts of unbelievers in the past,
I could not take so elastic a definition of Christianity as that.
그러므로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를 설명함에 있어서,
저는 두 가지 다른 점을 들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느님과 불멸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도덕적 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는 왜 그리스도를 인간 중에서 가장 선량하며
현명한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가를 말해야만 합니다.
과거에 비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이처럼 탄력성이 있는 기독교를 정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As I said before,
in the olden days it had a much more full-blooded sense.
For instance, it included the belief in hell.
Belief in eternal hell-fire was an essential item of Christian belief
until pretty recent times.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옛날의 기독교는 휠씬 생기발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지옥에 대한 믿음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원한 지옥의 유황불은 기독교 신앙의 한 본질적인 항목이었습니다.
 
In this country, as you know, it ceased to be an essential item
because of a decision of the Privy Council,
and from that decision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and the Archbishop of York dissented;
but in this country our religion is settled by Act of Parliament,
and therefore the Privy Council was able to override Their Graces
and Hell was no longer necessary to a Christian.
Consequently I shall not insist that a Christian must believe in hell.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국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의 결의로 더 이상 이 신조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이 결의에 반대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종교가 의회의 조례로써 결정되므로
추밀원은 양 주교를 무시할 수 있었고,
지옥은 더 이상 기독교도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저는 기독교도가
지옥을 꼭 믿어야 한다고 주장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The Existence Of God
하나님의 존재 문제
 
To come to this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God:
it is a large and serious question,
and if I were to attempt to deal with it in any adequate manner
I should have to keep you here until Kingdom Come,
so that you will have to excuse me
if I deal with it in a somewhat summary fashion.
하나님의 존재 문제에 이르면 이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또 만약 제가 이 문제를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려고 한다면
내세가 올 때까지 저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문제를 간결한 방식으로 다루어도
여러분은 저를 용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You know, of course, that the Catholic Church has laid it down
as dogma that the existence of God can be proved by the unaided reason.
This is a somewhat curious dogma, but it is one of their dogmas.
They had to introduce it because at one time the freethinkers
adopted the habit of saying that there were such and such arguments
which mere reason might urge against the existence of God,
but of course they knew as a matter of faith that God did exist.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카톨릭 교회는 교의로서
하느님의 존재는 다른 도움을 빌지 않고 증명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기묘한 교의이긴 하지만
어쨌든 카톨릭이 그것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는
한때 자유사상가들이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이성을 조금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논할 만한
이러이러한 증명법이 있다고 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카톨릭 교회는 신앙의 문제로서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arguments and reasons were set out at great length,
and the Catholic Church felt that they must stop it.
Therefore they laid it down as dogma
that the existence of God can be proved by the unaided reason
and they had to set up what they considered were arguments to prove it.
여러 가지 증명법과 이론들이 장황하게 발표되었으므로
카톨릭 교회는 그것을 막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가
다른 도움을 빌지 않는 이유로 증명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소위 그들의 증명법을 세웠습니다.
물론 그 증명법은 많지만, 저는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The First Cause Argument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
 
Perhaps the simplest and easiest to understand
is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It is maintained that everything we see in the world has a cause,
and as you go back in the chain of causes further and further
you must come to a First Cause,
and to that First Cause you give the name of God.)
아마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연쇄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 1원인에 도달하는데
이 원인을 하느님이라 이름한다.”
 
That argument, I suppose, does not carry much weight nowadays,
because, in the first place, cause is not quite what it used to be.
The philosophers and the men of science have got going on cause,
and it has not anything like the vitality it used to have;
but apart from that, you can see that the argument
that there must be a First Cause is one that cannot have any validity.
제가 보기에 이 증명법은 오늘날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원인도 옛날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원인에 대하여 계속 연구해 보았으나,
그것은 옛날만큼 힘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제 1원인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이 증명법은
아무런 타당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I may say that when I was a young man
and was debating these questions very seriously in my mind,
I for a long time accepted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until one day, at the age of eighteen,
I read John Stuart Mill's autobiography, and I there found this sentence:
"My father taught me that the question
'Who made me?' cannot be answered,
since it immediately suggests the further question
"Who made god'" that very simple sentence showed me,
as I still think, the fallacy in the argument of the First Cause.
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제가 젊어서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때,
저는 오랫동안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 여덟 살 되던 어느 날
'존 스튜어트 밀' 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가 다음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즉 “아버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누가 나를 만들었나’ 하는 문제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곧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나’ 하는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지극히 간단한 문장은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의 오류를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If everything must have a cause, then God must have a cause.
If there can be anything without a cause,
it may just as well be the world as God,
so that there cannot be any validity in that argument.
It is exactly of the same nature as the Hindu's view,
that the world rested upon an elephant,
and the elephant rested upon a tortoise;
and when they said, "How about the tortoise?"
the Indian said, "Suppose we change the subject."
만약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인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처럼 세계도 원인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타당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계는 코끼리의 잔등에 얹혀 있었으며,
코끼리는 거북의 잔등에 얹혀 있었다는 힌두교도의 생각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북은 어떻게 되었소?” 하면,
그 인도인은 “화제를 바꿔 봅시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The argument is really no better than that.
There is no reason
why the world could not have come into being without a cause;
nor, on the other hand,
is there any reason why it should not have always existed.
There is no reason to suppose that the world had a beginning at all.
The idea that things must have a beginning
is really due to the poverty of our imagination.
Therefore, perhaps,
I need not waste any more time upon the argument about the First Cause.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도 정말 그 얘기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세계가 원인 없이 생겨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세계가 반드시 존재했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세계는 그 시초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물은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1원인에 의한 증명법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봅니다.
 
 

The Natural-Law Argument
자연법칙에 의한 증명법
 
Then there is a very common argument from Natural Law.
That was a favorite argument all through the eighteenth century,
especially under the influence of Sir Isaac Newton and his cosmogony.
People observed the planets going around the sun
according to the law of gravitation,
and the thought that God had given a behest to these planets
to move in a particular fashion, and that was why they did so.
다음에 자연법칙에서 나온 아주 흔한 증명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전체를 통해서, 특히 아이잭 뉴튼 경과
그의 우주론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증명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성이 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태양의 주위를 운행하는 것을 관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이 유성들에게 그 특정한 양식으로 운행하도록 명령하였으며,
바로 이 명령 때문에 유성들이 그렇게 운행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That was, of course, a convenient and simple explanation
that saved them the trouble of looking
any further for any explanation of the law of gravitation.
Nowadays we explain the law of gravitation
in a somewhat complicated fashion that Einstein has introduced.
I do not propose to give you a lecture on the law of gravitation,
as interpreted by Einstein, because that again would take some time;
at any rate, you no longer have the sort of Natural Law
that you had in the Newtonian system,
where, for some reason that nobody could understand,
nature behaved in a uniform fashion.
물론 이것은 편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서,
그들에게서 인력의 법칙에 대한 설명을 더 이상 추구할 수고를 덜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소개한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인슈타인이 해석한 인력의 법칙에 대한 강의를
여러분에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뉴튼의 세계에서 보던 그런 자연법칙은 이미 볼 수 없습니다마는
이 뉴튼 법칙에 의하면,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연은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We now find that a great many things
we thought were Natural Laws are really human conventions.
You know that even in the remotest depth of stellar space
there are still three feet to a yard.
That is, no doubt, a very remarkable fact,
but you would hardly call it a law of nature.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은 인간의 관습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주공간의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똑같이 1야드는 3피트임을 알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중요한 사실입니다만,
여러분은 이것을 자연법칙이라고는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And a great many things
that have been regarded as laws of nature are of that kind.
On the other hand, where you can get down
to any knowledge of what atoms actually do,
you will find they are much less subject to law than people thought,
and the laws at which you arrive are statistical averages of just the sort
that would emerge from chance.
지금까지 자연법칙으로 생각되던 것 중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 반면에 여러분이 원자가 실제 어떠한 일을 하는가를 알아보려고 하면,
원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훨씬 법칙에 좌우됨이 적으며,
찾을 수 있는 법칙이란
결국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통계학적 평균치임을 알게 됩니다.


There is, as we all know, a law that says
if you throw dice you will get double sixes only about once in thirty-six times,
and we do not regard that as evidence to the contrary
that the fall of the dice is regulated by design;
on the contrary, if the double sixes came every time
we should think that there was design.
The laws of nature are of that sort as regards to a great many of them.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두개의 주사위를 던질 때
36회에 단 한 번씩 쌍육이 나온다는 법칙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을 주사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구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에 주사위가 번번이 쌍육이 나온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법칙에는 이런 종류의 것이 많습니다.


They are statistical averages such as would emerge from the laws of chance;
and that makes the whole business of natural law
much less impressive than it formerly was.
Quite apart from that, which represents the momentary state of science
that may change tomorrow,
the whole idea that natural laws imply a lawgiver is due to a confusion
between natural and human laws.
이 법칙들은 우연의 법칙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러한 통계학적 평균치입니다.
이로 인하여 자연법칙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과거보다는 훨씬 그 감동이 적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내일이라도 변할지 모르는 과학의 일시적 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일을 아주 떠나서 보더라도
자연법칙이 다른 법칙의 모체라는 생각은
자연법칙과 인간법칙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Human laws are behests commanding you to behave a certain way,
in which you may choose to behave, or you may choose not to behave;
but natural laws are a description of how things do in fact behave,
and being a mere description of what they in fact do,
you cannot argue that there must be supposedly someone
who told them to do that, because even supposing there were,
you are faced with the question,
"Why did god issue just those and no others?"
If you say that he did it simply from his own good pleasure,
and without any reason,
you then find that there is something which is not subject to law,
and so your train of natural law is interrupted.
인간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활동하라고 가르치는 명령이며,
이대로 여러분은 행동할 수도 있고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자연법칙이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이 실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기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일을 하도록 가르친 자가 반드시 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곧 부딪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은 왜 그러한 자연법칙은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느님의 단순한 기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은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결국 자연법칙의 일관성은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If you say, as more orthodox theologians do,
that in all the laws which God issues
he had a reason for giving those laws rather than others
-- the reason, of course, being to create the best universe,
although you would never think it to look at it --
if there were a reason for the laws which God gave,
then God himself was subject to law,
and therefore you do not get any advantage
by introducing God as an intermediary.
You really have a law outside and anterior to the divine edicts,
and God does not serve your purpose, as he is not the ultimate lawgiver.
만일 비교적 많은 정통파의 신학자들이 말하듯
하느님은 다른 법칙보다 자기가 제정한
모든 그 법칙들을 만드신 것이 이유가 있었다고 하면
즉 하느님이 만든 법칙에는 어떤 이유가 실제 있었다고 한다면,
그때는 하느님 그 자신이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셈이 되며,
따라서 하느님을 중간에 개입시켜 보았자 아무런 유리한 입장에 서지 못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성한 명령 이외에 또는 이전에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은 여러분의 목적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궁극적인 법칙 제정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In short, this whole argument from natural law
no longer has anything like the strength that it used to have.
I am traveling on in time in my review of these arguments.
The arguments that are used for the existence of God
change their character as time goes on.
They were at first hard intellectual arguments
embodying certain quite definite fallacies.
As we come to modern times they become less respectable intellectually
and more and more affected by a kind of moralizing vagueness.
간단히 요약하면 이 자연법칙에 의한 증명법은
전체가 이미 과거와 같은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증명법들을 검토하는, 적절한 시기에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이 증명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격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 증명법들은 아주 명백한 어떤 오류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처음에는 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이 증명법들은 지적으로 덜 숭상 받게 되었으며,
점점 더 일종의 도덕적인 장막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The Argument from Design
목적론적 증명법

The next step in the process brings us to the argument from design.
You all know the argument from design:
everything in the world is made just so that we can manage to live in the world,
and if the world was ever so little different, we could not manage to live in it.
That is the argument from design.
이 과정에 있어서의 다음 단계는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다 아실 줄 믿습니다만,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이란 세상을 살아 나가기에 꼭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만약에 조금이라도 다르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입니다만,
이 증명법은 흔히 이상한 모양을 지니고 나옵니다.

It sometimes takes a rather curious form; for instance,
it is argued that rabbits have white tails in order to be easy to shoot.
I do not know how rabbits would view that application.
It is an easy argument to parody.
You all know Voltaire's remark, that obviously
the nose was designed to be such as to fit spectacles.
That sort of parody has turned out to be not nearly so wide of the mark
as it might have seemed in the eighteenth century,
because since the time of Darwin we understand much better
why living creatures are adapted to their environment.
It is not that their environment was made to be suitable to them,
but that they grew to be suitable to it, that is the basis of adaptation.
There is no evidence of design about it.
예를 들면 토끼는 총을 쏘기에 좋도록 흰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의견의 적용을 토끼는 어떻게 생각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재담거리가 되기 쉬운 증명법입니다.
코는 안경을 끼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는 볼테르의 말을 다 아시지요.
이러한 재담은 18세기에는 엉뚱한 논리로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왜 주위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환경이 생물에 적합하도록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갔기 때문이며, 이것이 적응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목적론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When you come to look into this argument from design,
it is a most astonishing thing that people can believe that this world,
with all the things that are in it, with all its defects,
should be the best that omnipotence and omniscience
have been able to produce in millions of years.
I really cannot believe it.
이 목적론에 의한 증명법의 내용을 조사해 볼 때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 속에 사는 삼라만상과 그 많은 결함들을 보면서도
전지전능의 신이 수백년 걸려서 만들어 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Do you think that, if you were granted omnipotence and omniscience
and millions of years in which to perfect your world,
you could produce nothing better than the Ku Klux Klan or the fascists?
Moreover, if you accept the ordinary laws of science,
you have to suppose that human life
and life in general on this planet will die out in due course:
it is a stage in the decay of the solar system;
at a certain stage of decay you get the sort of conditions
and temperature and so forth which are suitable to protoplasm,
and there is life for a short time in the life of the whole solar system.
You see in the moon the sort of thing to which the earth is tending
-- something dead, cold, and lifeless.
여러분이 만약에 전지전능과,
당신의 세상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만년이라는 시일을 받는다면
쿠 클럭스 클랜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못 만드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또 과학의 일반법칙을 인정하신다면
이 지구상의 인간의 생명과 전생명체가 때가 오면 다 죽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태양계가 몰락하는 한 단계입니다.
몰락의 어느 단계에 가서는 원형질에 적당한 온도 조건 같은 것을 가지게 되며,
전태양계에 잠시 동안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달에서 지구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일종의 죽음, 냉기, 무생명 등의 그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
쿠 클럭스 클랜 : 1915년에 조직된 미국 국수주의자들이 비밀 조직
 
I am told that that sort of view is depressing,
and people will sometimes tell you that if they believed that,
they would not be able to go on living.
Do not believe it; it is all nonsense.
Nobody really worries about what is going to happen millions of years hence.
Even if they think they are worrying much about that,
they are really deceiving themselves.
They are worried about something much more mundane,
or it may merely be bad digestion;
but nobody is really seriously rendered unhappy by the thought of something
that is going to happen in this world millions and millions of years hence.
이런 의견은 사람들의 마음을 암담하게 만든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을 믿고서야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곧이 듣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무의미한 말들인 것입니다.
수백만 년 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정말 걱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그 일 때문에 자기가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상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계속적인 어떤 일은 걱정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소화불량일는지도 모릅니다.
수백만 년 이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어떤 일을 생각해서
정말로 심각하게 불행해지는 아무도 사람은 없습니다.
Therefore, although it is of course a gloomy view to suppose
that life will die out -- at least I suppose we may say so,
although sometimes when I contemplate the things
that people do with their lives I think it is almost a consolation
-- it is not such as to render life miserable.
It merely makes you turn your attention to other things.
그러므로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물론 우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들을 곰곰이 생각 해 볼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위안에 가까운 일이라고 해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해줄 그런 것은 아니며,
단순히 여러분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일 뿐입니다.
 
 
The Moral Arguments for Deity
신을 위한 도덕적 증명법
 
Now we reach one stage further in what I shall call the intellectual descent
that the Theists have made in their argumentations,
and we come to what are called moral arguments for the existence of God.
이제 우리는 일신론자들이
그 논증의 활동에서 세워 놓은 지적 계보라고도 할 만한,
한 발 더 나아간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존재를 위한 도덕적 증명법이 그것입니다. 


You all know, of course, that there used to be in the old days
three intellectual arguments for the existence of God,
all of which were disposed of by Immanuel Kant in the "Critique of Pure Reason;"
but no sooner had he disposed of those arguments
than he invented a new one, a moral argument, and that quite convinced him.
He was like many people: in intellectual matters he was skeptical,
but in moral matters he believed implicitly in the maxims
that he had imbibed at his mother's knee.
That illustrates what the psychoanalysts so much emphasize
-- the immensely stronger hold that our very early associations have
than those of later times.
물론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옛날에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지적 증명법이 있었습니다.
이 증명법들은 모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언급 직후에 그는 새로운 증명법을 발명했습니다.
그것이 곧 도덕적 증명법이며, 그는 이에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보통 사람과 같았습니다.
즉 지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는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격언들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분석가가 그처럼 강조하는 것
- 후년의 연상보다도 유년 시절의 연상 쪽이
우리에게 훨씬 큰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습니다.


Kant, as I say, invented a new moral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and that in varying forms was extremely popular during the nineteenth century.
it has all sorts of forms.
One form is to say there would be no right and wrong unless god existed.
I am not for the moment concerned with
whether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or whether there is not: that is another question.
제가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칸트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도덕적 증명법을 발명했으며,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어 19세기에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에는 여러 종류의 형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시비,
곧 옳은 것과 그른 것에 차이가 있느냐 또는 없느냐에 대해서는 덮어두겠습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The point I am concerned with is that,
if you are quite sure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then you are in this situation: is that difference due to God's fiat or is it not?
If it is due to God's fiat,
then for God himself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wrong,
and it is no longer a significant statement to say that God is good.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만약에 옳고 그른 것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차이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생겨났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약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서 처음 생겨났다면,
그때는 하느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은 그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이니까,
하느님이 이야기한 선이라는 말은 벌써 뜻이 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If you are going to say, as theologians do, that God is good,
you must then say that right and wrong have some meaning
which is independent of God's fiat, because God's fiats are good
and not bad independently of the fact that he made them.
If you are going to say that,
you will have to say that it is not only through God
that right and wrong came into being,
but that they are in their essence logically anterior to God.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느님을 선이라고 한다면, 옳고 그른 것은
하느님의 명령과는 상관없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하느님의 명령은 단순히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선한 것이며 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려면 또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생겨난 것은 하느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는 논리적으로 하느님에 앞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you could, of course, if you liked, say that there was a superior deity
who gave orders to the God that made this world,
or could take up a line that some of the Gnostics took up
-- a line which I often thought was a very plausible one
-- that as a matter of fact this world that we know
was made by the Devil at a moment when God was not looking.
There is a good deal to be said for that, and I am not concerned to refute it.
물론 당신은 이 세상을 만든 하느님에게 명령을 내린
더 높은 신이 있다고 가정하려고 한다면 할 수도 있고,
일부는 그노시스 파의 설명 방식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방식이란- 저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것이라고 종종 생각합니다만 -
즉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이 보지 않는 사이에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꽤 많습니다만, 저는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주) 
그노시스파 : 1세기 후반에 일어난 2세기에 교회을 위협한
지적 신비주의적 운동을 일으킨 일파.
구약의 신을 비인격적인 관념으로 바꾸어 율법의 준수를 배척하고
신비주의적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의 내재성을 중요시하였다.
 
 


2008/08/06 03:54 2008/08/06 03:54
Posted by Jay.

2007/11/22 14:11 2007/11/22 14:11
Posted by Jay.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러셀의 에세이. 개정판이다.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트란드 러셀을 이번 여름에 수강했던 철학 강의에서 알게 된 뒤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를 읽고 그의 뚜렷하고 정곡을 찌르는 철학적 견해에

깊히 동감하면서 러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 갈려고 하고 있다.

두번째로 접하게 된 그의 작품,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란 책을 읽다보면

'통찰' 이란 이런 것인가? 라는 질문에 빠지게 만든다.

37년에 죽었던 한 철학가가,

어떻게 이렇게 미래를 명확히 꽤뚫어 볼 수 있을까?

(미래를 보고 온듯한 그의 이야기에, 약간은 섬뜻한 기분도 들었다.)



인터넷에서 이 책의 정보를 보게되면,

대부분 4시간 노동이란 토픽에 이 책의 설명을 할애하는데,

모든 작품은 어떻게 해석 하는지 나름이지만,

나도 어떤분이 댓글에서 말씀 하신 것처럼,

효율적인 4시간 노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노동의 균형성으로 얻어지는 시간에, 사유하고 사색하며

기계적인 삶이 아닌 정말 사람다운 삶을 살으라는

메세지가 좀 더 뚜렷했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이였는데,

현대화와 정보화의 가속화로 인해 정보는 쉴새 없이

모든 매체를 이용하여 우리 속에 쏟아 붓지만,

과연 그 속에서 정말 유용한 지식만을 재외한 다른 것들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과연 그런 무용한 지식으로 자신을 채운 사람을,

지식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이젠 게으름 속에서 사색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읽으면서 마킹 해논 페이지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P20-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P29-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면 인간은 하찮아지고,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되고, 엄청난 집단 신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적인 완화책은 장기적인 고통의 근원만 증가시키는 꼴이다.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P52-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이 살아가는 데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고, 자신의 죽음이나 아내 혹은 아이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그를 흥미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끝장내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진정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청년기에 아낌없는 열정으로 젊음을 불태우고 자신의 인생을 걸 만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반듯이 필요하다
-P236-

2007/09/29 13:34 2007/09/29 13:34
Posted by Jay.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쓴 종교에 관한 에세이 모음이다. 표제 에세이는 본디 1927년 영국비종교인협회 런던 남부지부에서 행한 강연록이다.



끝내는데 나름 오래 걸렸다.

아무래도 말들이 상당희 난해하고 어렵다 보니, 분명히 집중해서 읽었는데도

한두번 더 읽어봐야지 이해를 할수 있었던 부분이 대부분 이였다.

-----------------

러셀이 책의 초반부에서도 말하다 싶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때 부터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말을 듣는지라

교회에 (타 종교도 포함이 되지만, 90% 이상이 교회라고 생각된다) 다니게 된다는 것 처럼,

나도 어렸을때는 아주 '절실한' 기독교인 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부터 생겨나는 궁금증과 의문들에겐

종교에선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의심 하지 말라' 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에 대한 신앙심도 점점 시간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크면서 다양한 사상과 역사를 차차 알게되고 공부해보면서,

느낀점은 기독교 처럼 잔인하고 꼬일때로 꼬인 복잡한 역사를 가진 종교가 없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무신론자 입장이지만,

지금은 종교들 중에선 기독교를 가장 멀리 두려고 한다.

언젠가 부터 생긴 나의 종교에 대한 불신은

이런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절대 진리에 대한 맹신의 위험함을

논리적으로 이해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러셀은 니체와 같이 '변질된' 종교에 일침을 가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름 열심히 읽고 있는 '만들어진 신' 과 이 책을 통해서,

종교들이 요구하는 '절대 진리' 의 위치에 나를 두지 않고,

당당하게 나를 그곳에서 멀리있게 해줄수 있는 좋은 독서였다.

-------------------------------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쳐논 밑줄들:

(알라딘 리뷰에 어떤 분이 올려놓으신 밑줄에 벌써 내가 밑줄 쳐논것은 옮겨오고,

그분이 안치신 문장들을 내가 추가함)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 이론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다 (Aquinas의 증명을 반박하는 글) -23-

결국 법칙은 신성한 칙령 외부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하나님은 별 소용이 없게된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적인 법칙 부여자가 아닌 셈이니까. -25-

'그럼 그 차이는 하나님의 명령 떄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거라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 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무 뜻 없는 말이 되고 만다. -29-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왓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는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31-

(러셀의 유명한 Quote..)

나는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불로 다스린다는 이 모든 교리가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 잔인성을 심고, 대를 잇는 잔인한 고문을 부여한 교리다.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볼 때, 예수 기록자들이 묘사한 대로라면 분명 복음서의 예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6-

바로 이 점이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사악해질 것이란 얘기 말이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극악했다. -38-

교회는 자칭 도덕이라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과다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편협한 행동 규범을 정해 놓고 그것을 도덕이라고 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요 역할은 여전히,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에 맞서는 데 머문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저러한 것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므로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그 문제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이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덕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40-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란 것은 전혀 없다. -40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과거에 단 한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했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원을 반대하였고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에 반대하고 있다. 한때 그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는 한술 더 떠서 지적인 생활까지도 반대했다. -44-



교회는 결혼을 파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사랑의 기교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배격함으로써, 아주 적은 쾌락과 아주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형태의 성만이 허용되어지는 교리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산아제한에 반대하는 것도 알고 보면 같은 동기에서 나왔다. -45-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이 반아들여지기까지 엄청난 윤리적 곡해가 수반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47-

이 세상은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세상이 안게 될 온갖 고통과 불행을 내다 보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이세상의 고통은 죄에서 기인하는 거라고 주장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무엇보다도 그 주장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강물이 범람하거나 화산이 폭팔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그 아이가 장차 살인광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낳는다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 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51-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기독교 덕택에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신앙의 많은 부분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어온 수세대에 걸친 자유 사상가들 덕분이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속의 온유함과 합리주의는 모두 과거 정통 기독교인들으로부터 박해 받았던 사람들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기독교는 참으로 온유하고 합리적이라고 말 하는 걸 들으면 우습기까지하다. -54-



우주의 모든 전개는 소위 선이라는 결과, 다시 말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하는 비교적 현대적인 관념이 있다. 이 관념 역시도 우주는 우리와 취미와 편견을 같이 하는 존재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보는 자위적 가정이다. -60-



중교를 통해 구현되는 정의와 불의 그 중 하나를 강조하려면 반드시 나머지 하나도 강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에 있어 불의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 군중이 싫어하는 류의 행동이다. 그것을 불의라고 지칭함으로써, 그리고 그 관념 주변에 정교한 체계를 설치함으로써, 군중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들에 벌을 가하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한편, 군중들 자신은 본래 정의롭다는 이유로 잔인함에 대한 충동을 풀어놓은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고양시킨다. 따라서 정의 관념의 본질은 잔인함에 정의의 옷을 입혀 사디즘의 출구를 허용해주는 것이다. -60-



교회가 승인하는 것이 정의이며 승인 받지 못하면 불의이다. 결국 정의 관념의 실질적인 내용은 대중의 반감을 정당화하는 것 -61-



정통 기독교적 개념의 훌륭한 삶은 덕 있는 생활인데 이때 덕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뜻은 양심의 목소리를 통해 개인에게 드러난다. 이러한 모든 관념은 인간의 외제적 압제에 종속 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양심이란 것은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도자라고 할 수 있다. -96-



인류학이 보여주듯, 인류의 옮고 그름에 대한 관점은 변하지 않은 조항이 단 한 가지도 없을 정도로 끝없이 변화해왔다. -114-

2007/08/17 22:19 2007/08/17 22:19
Posted by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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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own view on religion is that of Lucretius. I regard it as a disease born of fear and as a source of untold misery to the human race. I cannot, however, deny that it has made some contributions to civilization. It helped in early days to fix the calendar, and it caused Egyptian priests to chronicle eclipses with such care that in time they became able to predict them. These two services I am prepared to acknowledge, but I do not know of any others.
-- Bertrand Russell, "Has Religion Made Useful Contributions to Civilization?"

종교에 대한 나 자신의 관점은 루크레티우스의 것과 같다. 나는 종교를 두려움으로부터 태어난 질병이자 인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문명에 약간의 공헌을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문명의 초기에 역법을 제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이집트의 사제들로 하여금 매우 주의깊게 일식을 기록하게 하여 머지않아 그들이 일식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두가지 공헌은 내가 기꺼이 인정하려니와, 그 외의 어떤 다른 공헌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다.

Are you never afraid of God's judgment in denying him?
     "Most certainly not. I also deny Zeus and Jupiter and Odin and Brahma, but this causes me no qualms. I observe that a very large portion of the human race does not believe in God and suffers no visible punishment in consequence. And if there were a God, I think it very unlikely that He would have such an uneasy vanity as to be offended by those who doubt His existence."
-- Bertrand Russell, "What Is an Agnostic?"

당신은 신을 부인하면서 야훼의 심판을 두려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 "결단코 없다. 나는 또한 제우스와 주피터 그리고 오딘과 브라흐마도 믿지 않지만, 그것때문에 어떤 가책이나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인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 때문에 어떠한 눈에 띄는 징벌도 받지 않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신이란 것이 있다면,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때문에 기분이 상할만큼 그런 거북스런 허영심을 지니고 있을 리는 없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Religion is something left over from the infancy of our intelligence, it will fade away as we adopt reason and science as our guidelines.
-- Bertrand Russell (attributed: source unknown)

종교란 우리 지성의 유아기로부터 남겨진 흔적같은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이성과 과학을 우리의 지침으로 채택함에 따라서 사라져갈 것이다.

So far as I can remember, there is not one word in the Gospels in praise of intelligence; and in this respect ministers of religion follow gospel authority more closely than in some others.
-- Bertrand Russell, quoted, in part, from Jonathon Green, The Cassell Dictionary of Cynical Quotations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복음서에 지성을 칭송하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성직자들은 성서의 권위를 더 잘 따른다.



That is the idea -- that we should all be wicked if we did not hold to the Christian religion. It seems to me that the people who have held to it have been for the most part extremely wicked. You find this curious fact, that the more intense has been the religion of any period and the more profound has been the dogmatic belief, the greater has been the cruelty and the worse has been the state of affairs. In the so-called Ages of faith, when men really did believe the Christian religion in all its completeness, there was the Inquisition, with all its tortures; there were millions of unfortunate women burned as witches; and there was every kind of cruelty practiced upon all sorts of people in the name of religion.
-- Bertrand Russell, "Why I Am Not A Christian," Little Blue Book No. 1372 edited by E Haldeman-Julius.

그것은--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사악해질 것이라는-- 견해이다. 나에게는 기독교신앙을 고수했던 사람들이 대체로 극히 사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어느 시기에서든 종교가 열렬하면 열렬할 수록, 그리고 독단적 신앙이 깊어지면면  깊어질수록, 잔인함은 더 심해졌으며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는, 이러한 기묘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위 믿음의 시대에, 그 때에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정말로 철저하게 믿었었거니와,  그 모든 고문과 더불어 이단자탄압이 있었고;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무수한 불운의 여인들이 있었고,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자행된 모든 종류의 잔학행위가 있었다.

If fifty million people say a foolish thing, it's still a foolish thing.
-- Bertrand Russell (attributed: source unknown)

5천만이 한 목소리로 바-보같은 소리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바-보같은 소리일 뿐이다.

The fact that an opinion has been widely held is no evidence that it is not utterly absurd; indeed, in view of the silliness of the majority of mankind, a widespread belief is more likely to be foolish than sensible.
-- Bertrand Russell, "Christian Ethics" from Marriage and Morals (1950), quoted from James A Haught, ed., 2000 Years of Disbelief

어떤 의견이 널리 보유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그것이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 게다가 인류의 대부분의 어리석음에 비추어볼 때에, 널리 퍼져있는 믿음은 분별있기보다는 어리석은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My whole religion is this: do every duty, and expect no reward for it, either here or hereafter.
-- Bertrand Russell, childhood diary, quoted from Against the Faith by Jim Herrick

내 종교는 이것뿐이다: 모든 의무를 다하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말라, 이생에서든 내세에서든.

"Everything Hitler did to the Jews, all the horribly unspeakable misdeeds, had already been done to the smitten people before by the Christian churches. . . . The isolation of Jews into ghetto camps, the wearing of the yellow spot, the burning of Jewish books, and finally the burning of the people - Hitler learned it all from the church. However, the church burned Jewish women and children alive, while Hitler granted them a quicker death, choking them first with gas."
-Dagobert Runes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한 모든 짓들, 모든 끔찍하리만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행들은 이미 그 이전에 기독교회에 의해서 박해받은 사람들에게 행해졌던 것들이었다. 강제거주구역으로의 유대인 고립정책, (유대인을 식별하는) 노란 별의 착용, 유대서적의 소각,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의 화형에 이르기까지- 히틀러는 그 모든 것을 교회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교회는 유대 여인과 어린이들을 산 채로 태워죽인 반면, 히틀러는 개스로 먼저 질식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좀 더 빠른 죽음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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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에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 책에 밑줄 쳐논게 문득 생각이 난다.

'종교는 두려움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연혹시킨다' 라고 했었던가..

기억에서 더듬어서 적는거지만, 거의 비슷할꺼라 생각한다.

Anyway, 상당희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함.

2007/07/31 22:56 2007/07/31 22:56
Posted by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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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trand Russell





자기의 지나간 실패에 대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

한 가지 실패를 자꾸 괴로워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도 실패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한 번의 실패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좋다.

자기 학대의 모든 감정은 체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기 학대의 감정은 자기를 해롭게 할 뿐 아니라 남도 해롭게 한다.

-Bertrand Russell-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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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철학 클래스를 듣다가 깊게 알게된 철학자 이다.
예전에 가끔 "세계의 문학을 읽는다" 같은 책에서 본문중에 러셀의 말을 인용한걸 여러번 읽어봤을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별 생각없이 듣게된 철학 클래스의 끝에 다가섰을땐,
이런저런 철학가의 작품들을 읽고 싶어졌다는 생각이 생겼다.
물론 아직 집에 예전에 사놓고 안읽은 책이나, 읽다 말은 책이 족히 20권이 넘는것 같은데,
다다음주 쯤이나 한번 러셀의 작품 두권정도를 살듯 하다.
기계적으로 다람지 챗바퀴 돌려가는 느낌이 드는 삶에선
가끔은 철학자의 시각으로 새상을 보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2007/07/29 01:22 2007/07/29 01:22
Posted by Jay.